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기록이 제각각이라 도저히 같은 지역이라고 볼 수가 없다.
나무위키의 우산국/역사에 보면
按撫使金麟雨還自于山島 獻土産大竹水牛皮生苧綿子檢樸木等物 且率居人三名以來 其島戶凡十五口男女幷八十六
안무사 김인우가 우산도(于山島)에서 돌아와 토산물인 대죽·수우피·생저·면자·검박목 등을 바쳤다.
또, 그곳의 거주민 3명을 거느리고 왔는데, 그 섬의 호수는 15구요, 남녀를 합치면 86명이었다.
ㅡ 《태종실록》
于山島鬱陵島一云武陵一云羽陵 二島在縣正東海中 三峯及業掌空 南峯梢卑 風日清明則峯頭樹木 及山根沙渚 歴歴可見 風便則二日可到 一説于山鬱陵本一島 地方百里
우산도와 울릉도또는 무릉(武陵) 또는 우릉(羽陵) 두 섬이 이 현(울진현) 정동쪽 바다 가운데 있다.
세 봉우리가 곧게 솟아 허공에 있는데, 남쪽의 봉우리는 약간 낮다.
바람이 불고 청명하면 봉우리 머리의 수목과 산 밑의 모래톱을 역력히 볼 수 있고, 순풍이면 이틀에 갈 수 있다.
일설에 우산도와 울릉도는 본디 하나의 섬이고 지방은 백 리에 걸쳤다 한다.
ㅡ 《신증동국여지승람》
우산도(牛山島)와 무릉도(茂陵島)의 두 섬에는 읍(邑)을 설치할 만하니, 그 물산(物産)의 풍부함과 재용(財用)의 넉넉함은, 저목(楮木)·저상(苧桑)·대죽(大竹)·해죽(海竹)·어교목(魚膠木)·동백목(冬栢木)·백자목(栢子木)·이목(梨木)·시목(柹木)과, 아골(鴉鶻)·흑색 산구(黑色 山鳩)·해의(海衣)·복어(鰒魚)·문어(文魚)·해달(海獺) 등의 물건이 있지 않은 것이 없으며, 토지가 비옥하여 화곡(禾穀)의 생산이 다른 지방보다 10배나 된다. 동·서·남·북이 상거(相距)가 각각 50여 리(里)나 되니 백성이 거주할 수가 있으며 (하략)
ㅡ 《세조실록》
조선시대의 기록 검토
태종실록 1431 (세종 13)
- 인구 86명
- 토산물
- 大竹대죽: 두꺼운 대나무
- 水牛皮수우피: 물소가죽 (바다사자같은것으로 봐야할듯. 동남아의 검은물소가 아니다)
- 生苧생저: 생 모시
- 綿子면자
- 檢樸木검박목
신증동국여지승람 1530년
- 우산도와 울릉도 두 섬. 일설에 우산도와 울릉도는 본디 하나의 섬이고 지방은 백리에 걸쳤다 한다(사실은 영 다른 섬이라는 뜻)
세조실록 1455 - 동서남북 50리(20km)
현재 울릉도
지금도 울릉도 인구는 1만을 넘지 못한다
육지에서 물자를 엄청나게 실어 날라서 유지되는 1만…
자체적으로 자원을 수급해야 했다면 인구는 1천명을 넘을 수 없다.
조선시대에 86명이라고 하는데 삼국시대라고 다를건 없었을 것이다.
- 인구 100명가량의 섬을 우산국이라고 부르고 그 나라에 왕도 있고 여기를 복속시키기 위해서 군대를 보내??? 말도 안된다. 일반인 100명은 군인 20명만 가도 충분히 제압 가능하다.
- 고려와 왜 사이의 무역항도 될 수 없다. 일본으로 갈 때 울릉도를 거쳐 가는게 비효율적이다.
- 경상도의 포항, 부산 등에서 출발해서 대마도, 큐슈를 거쳐 가던가
- 블라디보스토크나 그 윗쪽에서 홋카이도를 거쳐서 일본 서부해안을 타고 가야한다. 일본 서부해안에는 주요 도시가 없으니 연안을 타고 에도나 나라로 이동해야한다.
- 물자보급도 안되고 사방이 절벽이라 정박도 힘들어서 풍랑을 만나서 어쩔 수 없이 들어간다면 모를까 무역항나 거점이 될 수는 없다.
- 어업기지는 가능. 86명 정도면 딱 어업기지 수준이다.
울릉도는 어부들의 어업기지이기도 하면서 소수 정착민들이 지냈을거라고 보는게 타당하다. 우산국이 국가로 인정받을 정도였다면 울릉도일 수는 없다.
시대와 각 사서에 따라 ‘우산국’, ‘우산도’, ‘무릉도’, '울릉도’는 같은것을 칭하기도 하고 다른것을 칭하기도 한다.
한국의 울릉도, 독도 관련한 역사는 독도 영유권 관련해서 생각하느라 제대로 된 역사 해석이 나오지 못하고 있다.
신라시대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부터 우리 땅이었다고 하기 위해서 우산국이 울릉도와 독도라고 우길 수 밖에 없는 상황?