리 왕조의 고려 망명과 황제국 고려
개요
**베트남 리 왕조(李朝)**의 마지막 황제 **이룡(李龍, Ly Long Tuong)**은 13세기 초 몽골의 위협을 피해 고려로 망명했습니다.
이 사건은 단순한 피난이 아니라, 고려가 황제국이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.
단순한 국경을 넘는 난민 이동이 아니라, 문명권 내부의 귀속 이동이라는 시각이 필요합니다.
고려는 황제국이었다
고려는 단지 한반도에 국한된 국가가 아니었습니다.
중원의 남부 및 동부 해안, 만주, 한반도 전역을 영토로 삼은 대제국이자 황제국 이었습니다.
따라서 베트남 리 왕조의 왕족이 고려로 망명한 사건은,
오늘날 우리가 인식하는 ‘먼 바다를 건너 타국으로 피신한 것’이 아니라,
바로 인접해 있는 같은 문명 질서 내의 상위 정치체계로 이동한 귀속 사건 으로 볼 수 있습니다.
리 왕조와 고려의 관계 가설
- 리 왕조는 송나라와 독립적이면서도 고려와 밀접한 외교 관계를 맺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.
- 이룡의 망명은 고려를 **상국(上國)**으로 인정하고 의지한 결과일 수 있습니다.
- 이는 반도 중심 사관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해양 중심 황제질서를 전제로 해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.
이씨(李氏) 성씨의 동아시아 확산
- 중국: 당나라 황실 (이연, 이세민)은 농서 이씨(隴西李氏) 계열
- 한국: 전주 이씨, 경주 이씨, 연안 이씨 등은 신라 및 고려계 귀족
- 베트남: 리 왕조 역시 당계 또는 동이족계 귀족에서 분화된 가능성
이씨는 단순히 많은 성씨 중 하나가 아니라,
동아시아 귀족권력의 핵심 성씨로서 광범위한 문화·정치 네트워크를 구성했습니다.
망명이 아닌 귀속이었다
- 고려는 이룡을 귀족으로 예우하고 관직을 수여했습니다.
- 후손들은 군공을 세우고 **화산이씨(花山李氏)**로 정착해 조선시대 무반 가문으로 성장했습니다.
- 이는 단순한 수용이 아닌, 정치적·제도적 흡수였습니다.
화산이씨를 통해 본 역사
- 화산이씨는 이룡을 시조로 하는 귀화 성씨입니다.
- 고려~조선에 걸쳐 무반으로 활동하며 한국과 베트남 간의 역사적 연계를 상징합니다.
베트남 리 왕조 연표 (요약)
시기 | 사건 |
---|---|
1009년 | 이공온(李公蘊), 리 왕조 수립 |
1010년 | 수도를 하노이(탕롱)로 이전 |
11세기 | 불교 국가 체제 확립, 송과 외교 독립 유지 |
1225년 | 이룡 폐위, 진 왕조 성립 |
1226~1230년 | 이룡, 고려로 망명 |
고려 영토의 재해석
고려는 단지 반도 국가가 아니라,
중원 남부·동부 해안과 만주, 한반도를 영토로 삼은 황제국 이었습니다.
이런 구조 속에서 리 왕조의 망명은 지리적 단절이 아닌,
같은 고려 영토 내에서의 귀속 이동 으로 볼 수 있습니다.
성씨 확산과 현대의 왜곡
- 조선 후기 이후, 신분제 해체와 양반화 과정으로 일반 백성들도 ‘이씨’ 성을 갖게 되었습니다.
- 그러나 고려 시대까지만 해도 성씨는 정치적·사회적 귀속을 상징하는 집단의 이름이었습니다.
- 화산이씨 사례는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.
요약 정리
- 리 왕조는 고려의 제후국 혹은 외교 동맹국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.
- 이룡의 망명은 정치적 귀속 이동이며, 고려는 이를 제도적으로 흡수했습니다.
- 고려는 동아시아 문명권의 황제국으로, 리 왕조 망명은 그 질서 내 사건이었습니다.
- 화산이씨는 그 귀속과 연계의 실제적 증거 입니다.
참고 자료
- 나무위키: 리 왕조
- 고려사, 고려사절요
- 베트남 국가박물관 리 왕조 해설
- 외교부 귀화 성씨 관련 정리자료